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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카키바라 에이스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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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카키바라 에이스케는 일본의 경제학자이자 전직 재무관료이다. 도쿄 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미시간 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재무성에서 국제금융국장과 재무관을 역임했으며, '미스터 엔'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엔고 정책을 추진했다. 퇴관 후에는 와세다 대학교 객원 교수와 아오야마 가쿠인 대학교 교수를 역임하며, 저술 활동과 방송 출연을 통해 경제 관련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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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카키바라 에이스케
기본 정보
2004년 독일에서
이름사카키바라 에이스케
출생일1941년 3월 27일 ()
지역일본의 경제학자
연구 분야국제 금융론
특기할 개념관료 시절부터 정력적으로 경제학 연구 및 경제학 전문 서적 집필 활동을 함
참고 자료
제목사카키바라 교수는… 1990년대 ‘미스터 엔’ 세계 외환시장 주물러
URL문화일보 기사
날짜2018년 6월 1일
확인 날짜2021년 12월 19일

2. 학력

연도내용
1964년 3월도쿄 대학 경제학부 졸업
1965년 3월도쿄 대학 대학원 경제학 연구과 석사 과정 수료
1969년 5월미시간 대학교 경제학 연구과 박사 과정 수료 (경제학 박사)


3. 경력

요코하마 국립대 가마쿠라 중학교와 도립 히비야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히비야 고등학교 재학 중 미국으로 교환 유학을 다녀왔다. 도쿄 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하고(고미야 제[2]),[3] 동 대학 대학원 경제학 연구과 석사 과정 (이론 경제)을 수료했다. 대학원 진학 후 대장성 대신관방 비서과장 다카기 후미오를 만나 국가 공무원 상급직 시험 경제직렬 14번으로 합격하여 1965년 대장성에 입성했다.[4]

피츠버그 대학교미시간 대학교에서 유학했으며, 미시간 대학교 대학원 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경제학 박사 학위(미시간 대학교, 1969년)를 취득했다.[3]

3. 1. 대장성


  • 1965년 4월: 대장성에 입성하여 관세국 국제과에 배속되었다.[6]
  • 1969년 4월: 대신 관방 비서과 재무관실 주임이 되었다.[6]
  • 1970년 7월: 도요오카 세무서장을 맡았다.
  • 1971년 9월: 국제 통화 기금(IMF) 파견 직원이 되었다.
  • 1975년 7월: 은행국 보험부 보험 제1과장 보좌를 맡았다.
  • 1977년 8월: 사이타마 대학 교양학부 조교수로 발령받았다. 이는 관료 비판 및 자민당 정치 비판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논문을 발표한 것에 대한 좌천성 인사였다.[5]
  • 1980년 9월: 하버드 대학교 객원 부교수를 맡았다.
  • 1981년 7월: 대신 관방 기획관 겸 국제 금융국 조사과에 배속되었다.
  • 1983년 4월: 일본 수출입 은행 촉탁 (국제 금융 정보 센터 총무부장)을 맡았다.
  • 1985년 6월: 이재국 국고과장을 맡았다.
  • 1987년 7월: 이재국 자금 제2과장을 맡았다.
  • 1988년 6월: 이재국 국채과장을 맡았다.
  • 1989년 6월: 이재국 총무과장을 맡았다.[5]
  • 1990년 6월: 도카이 재무국장을 맡았다.
  • 1991년 6월: 대신 관방 심의관 (국제 금융국 담당)을 맡았다.
  • 1993년 7월: 국제 금융국 차장을 맡았다.
  • 1994년 7월: 재정 금융 연구소 소장 겸 회계 센터 소장을 맡았다.
  • 1995년 5월: 국제 금융국장에 취임하였다.[3]
  • 1997년 7월: 재무관에 취임하였다.[3]
  • 1999년 7월: 퇴관하였다. 후임은 구로다 하루히코 국제국장이었다.

3. 2. 퇴관 후

게이오기주쿠 대학 글로벌 시큐리티 센터 교수를 거쳐, 2006년 봄부터 와세다 대학 종합 연구 기구 객원 교수 (전임 대우), 인도 경제 연구소 소장을 맡았다.[3] 2010년 4월부터 아오야마 가쿠인 대학 특별 초빙 교수가 되었다.[3]

4. 주요 정책 및 활동

재무국 국고과장 시절 천황 폐하 재위 60년 기념 금화 발행을 기획했다. 이 금화는 액면가 10만 엔에 대해 금 함유량이 4만 엔 정도에 불과하여 정부는 1개당 6만 엔에 가까운 차익을 얻었다. 때문에 처음에는 세외 수입 획득의 묘안으로 높게 평가되었지만, 주형에서 주조하는 금화는 위조 방지가 어렵고, 위조 금화 사건을 유발했다[8]。 게다가 다음 해에 100만 개를 추가 발행하여 기념 주화로서의 희소성을 잃게 했다.

제2차 하시모토 내각 당시 재무관 재임 중 금융 빅뱅의 첫걸음으로, 「내외 자본 거래의 자유화」와 「위은주의 폐지」를 골자로 한 외환법 개정(1998년 4월 시행)에서 미즈노 키요시를 끌어들여 추진했다.

재무관 취임 당시의 미국 통화 정책 책임자 로렌스 서머스 미국 재무부 차관과는 사카키바라가 하버드 대학교 객원 교수를 한 이후의 친구였으며, 미국을 상대로도 콤플렉스 없이 맹렬한 토론을 벌이는 점이 취임 이유였다. 그 후 미국과 보조를 맞춘 환율 개입 정책으로 1995년 가을에는 초엔화 강세 시정 조치에 그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주로 언론과 외환 딜러 관계자들로부터 "미스터 엔"이라는 애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5. 사상 및 주장

사카키바라 에이스케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대학 강의 및 저서를 통해 영어로 의사소통하는 능력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퇴관 후 저작물에서는 미국·유럽 중심의 시대가 끝나고 다시 중국·인도 중심의 시대가 올 것(리오리엔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관료 시절 후반에도 젊은 관료들의 중국 유학을 추진하는 등(그 전까지는 대장성·재무성의 젊은 인재들의 유학 대상은 프랑스·독일·미국이 중심) 이러한 의식을 관료 시절부터 품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일본의 디플레이션에 대해서는 "일본의 경우, 디플레이션이라고 해도 내구 소비재의 가격 하락 기여율이 높고,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구매하는 재화의 가격이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내구 소비재에 대해서는 이만큼 소비가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경쟁이 치열하므로, 하락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면, 일본의 디플레이션은 그다지 걱정할 필요가 없는 현상이다", "디플레이션을 병처럼 한탄하는 것을 멈추고 완만한 디플레이션을 즐겨야 한다"라고 언급하고 있다.[9][10]

2013년 2월 17일 아사히 신문 인터뷰에서 "센카쿠 열도를 둘러싼 문제의 발단은 이시하라 전 지사노다 정권의 매입·국유화 움직임에 있었다. 파문을 일으킨 일본 스스로가 외교적 해결을 위해 모든 노력을 해야 한다"라고 발언했다.[13]

6. 논란 및 비판

다이와 은행 뉴욕 지점 거액 손실 사건과 관련하여 다이와 은행으로부터 보고를 받고도 6주나 발표가 지연된 것에 대해, 당시 국제금융국장이었던 사카키바라는 그 이유로 "(연락하지 않은 것은) 적절한 조치였으며, 미일 문화의 차이가 이유다"라고 말했다[11]。 이 설명에 대해 미국 하원 공청회에서 비난이 집중되었다[12]

7. 기타

취미는 스쿠버 다이빙이다. 가족으로는 아내와 아들, 딸이 있다.[7]

황후 마사코(당시 오와다 마사코)의 하버드 대학교 경제학부 졸업 논문 "EXTERNAL ADJUSTMENT TO IMPORT PRICE SHOCKS / OIL IN JAPANESE TRADE"(수입 가격 충격에 대한 외부 조정·일본의 석유 무역)의 사의에서 누카자와 카즈오, 마노 테루히코와 함께 이름이 언급되었다.[7]

과거 자유민주당에서 출마를 준비했으나 실현되지 못했다.[7] 2003년 총선거에서는 민주당의 정권 교체 후 재무대신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다.[7]

아버지는 아시다 히토시 내각총리대신 비서관을 지낸 사카키바라 레이이치이다. 할아버지는 기독교 개신교 목사였다.[7]

8. 저서

출판 연도제목출판사
1970년"Dynamic Optimization and Economic Policy"American Economic Review
1975년"A Dynamic Approach to Balance of Payments Theory"Journal of International Economics
1975년『유로달러와 국제 통화 개혁』일본경제신문사
1977년『일본을 연출하는 신관료상』야마테 서방
1986년『FB 정부 단기 증권』금융재정사정연구회
1990년『자본주의를 넘어선 일본 - 일본형 시장 경제 체제의 성립과 전개』도요경제신보사
1993년『문명으로서의 일본형 자본주의 - "부"와 "권력"의 구도』도요경제신보사
1995년"The End of Progressivism: A Search for New Goals"Foreign Affairs
1995년『미·일·유럽의 경제·사회 시스템』도요경제신보사
1996년『진보주의로부터의 결별 - 일본 이질론자의 죄』요미우리신문사
1997년『신세기를 향한 구조 개혁 - 진보에서 공생으로』요미우리신문사
1998년『국제 금융의 현장 - 시장 자본주의의 위기를 넘어』PHP연구소
1999년『시장 원리주의의 종언 - 국제 금융의 15년』PHP연구소
2000년『일본과 세계가 흔들린 날 - 사이버 자본주의의 성립』주오코론신샤
2001년『인도 IT 혁명의 경이』분게이슌주
2002년『분권 국가로의 결단』마이니치신문사
2002년『환율을 알면 세계가 보인다』분게이슌주
2002년『새로운 국가를 만들기 위해』주오코론신샤
2003년『구조 디플레이션의 세기』주오코론신샤
2003년『디플레이션 생활 혁명』주오코론신샤
2004년『연금이 사라진다』주오코론신샤
2005년『경제의 세계 세력도』분게이슌주
2005년『아시아는 근대 자본주의를 넘어선다』주오코론신샤
2006년『음식을 알면 세계 경제가 보인다』분게이슌주
2006년『황금의 인생 설계도』주오코론신샤
2007년『유아화하는 일본 사회』도요경제신보사
2007년『일본은 몰락한다』아사히신문사
2008년『정권 교체』분게이슌주
2008년『몰락으로부터의 역전』주오코론신샤
2008년『대 전환 (패러다임 시프트)』후지와라 서점
2008년『강한 엔은 일본의 국익』도요경제신보사
2010년『료마 전설의 허실 - 승자가 쓴 유신의 역사』아사히신문출판


9. 출연 방송


  • 사카키바라 에이스케 쇼 업 경제학 (닛폰 방송, 매주 화요일 19:30 - 19:40)
  • 사카키바라 에이스케의 식탁 건너편에 (BS-i(현: BS-TBS), 과거)
  • 사카키바라・시마의 글로벌 내비 (BS-TBS)
  • Biz 스포 (NHK 종합) 부정기
  • 서부 마이 세미나 (TOKYO MX)


제목방송일
당대의 스페셜리스트 기질을 논하다2009년 4월 18일
공공 활동으로 시장을 뒷받침하다2009년 10월 10일


참조

[1] 서적 日本の官庁,その人と組織:大藏省 政策時報社 1993
[2] 서적 財務官僚の仕事力:最強官庁の知られざる出世事情 2015
[3] 서적 大蔵批判に逆襲する男 国際金融局長 榊原英資の正体 別冊宝島244『大蔵官僚の病気』 1996-01-02
[4] 서적 財務省 新潮新書 2012-06
[5] 뉴스 ミスター円と呼ばれて(3)前大蔵省財務官榊原英資氏(人間発見) 日本経済新聞 1999-08-16
[6] 서적 職員録 昭和45年版 上巻 大蔵省印刷局 1969
[7] 서적 財務省 新潮新書 2012-06
[8] 서적 金利と経済 ダイヤモンド社 2017
[9] 웹사이트 【論風】青山学院大学教授・榊原英資 アベノミクスは成功するか (1/3ページ) https://archive.is/5[...] 2013-02-14
[10] 웹사이트 榊原元財務官:日本はデフレを嘆くより楽しむべきだ-止める方法ない http://www.bloomberg[...] 2010-03-29
[11] 뉴스 大和銀事件で大蔵省・榊原国際金融局長 米への連絡遅れは「文化の違い」 産経新聞 1995-10-16
[12] 서적 これでも国家と呼べるのか―万死に値する大蔵・外務官僚の罪 クレスト社 1996-02
[13] 뉴스 どっちにもつく立場を生かせ 朝日新聞 2013-02-17
[14] 뉴스 사카키바라 교수는… 1990년대 ‘미스터 엔’ 세계 외환시장 주물러 http://www.munhwa.co[...] 문화일보 2021-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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